[우연이 만든 서가] Happily ever after 이후의 삶 - 장강명 《표백》




한국에는 '열심히 하면 언젠가 잘 될 거야'라는 이름의 종교가 있다이 종교는 다수의 신자들을 거느리고 있으며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어떤 고난의 길을 거쳐 해당 종교의 신과 영접했는지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다이 종교는 '도무지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성취감' '주어진 시련에 당당히 맞서 자신의 꿈을 이룬 용기'를 복음으로 제시한다해당 종교의 경전은 출간되자마자 전국 서점에 깔리고 세대 구분 없이 소비된다.

 

포교 방식은 다양하고 논리적이다신도들은 입시취업아파트라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세공한 욕망에 기댄다. ‘큰 꿈을 가져라’ 혹은 ‘자신이 진짜로 바라는 것이 뭔지 알고 그것만을 향해 가라는 말씀과 ‘조금만 눈을 낮춰 중소기업에도 취직하라’, ‘20대는 열정으로도 먹고 살 수 있으니 괜찮다는 말씀을 모두 품은 하나의 종교, 나는 이보다 무서운 종교를 본 일이 없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있으면 그 맞은 편엔 회의주의자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다이 회의주의자들은 종교에 의문을 제기하다가 대개 무신론 혹은 비관주의로 빠지거나자신을 지배해줄 다른 종교를 찾아 나선다장강명 작가의 소설 《표백》은 20대인 주인공들이 빠지고만 다른 종교를 이야기한다그들이 빠진 종교는 '내가 발버둥쳐봐야 세상은 바뀌지 않아'이다.

 

"이 사회에서 내가 가진 조건들로 그걸 이뤄낼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지나뿐 아니라 우리 세대 모든 젊은이가 그래그렇게 계속 삶을 유지하는 게 자살하는 것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란 걸 알아그렇다고 삶을 선택해야 해? (중략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친다이른바 표백 세대의 등장이다."

 

'표백 세대'. 무엇도 다 삼키는 거대하고 새하얀 세상에 돌을 던져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에 마주한 세대소설 《표백》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청년들을 '88만원 세대'가 아닌 '표백 세대'라고 정의한다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도 이전 세대가 이룩한 것보다 더 나은 삶을 이룩할 수 없다.

 

현재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20대는아니 고도의 압축 성장을 이룬 대부분의 사회에 살고 있는 청년들은 극소수의 선택된 사람이 아닌 이상 자신의 부모 세대가 누린 수준의 삶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못할 공산이 크다이는 예언이 아닌 통계다양질의 졸업자는 넘쳐나는 반면 그들을 수용할 일자리가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고대 설화 속 영웅의 탄생에도 법칙이 있듯비천한 곳에서 탄생해 경제성장이라는 조력자를 만난 우리 시대의 영웅들은 태평성대를 이루고 현재 한국사회의 단물을 향유하고 있다이들은 영웅이 된 자신의 DNA를 물려받은 아들딸들은 자신보다 좀 더 위대한 길을 걸을 거라 생각한다자신보다 훨씬 좋은 환경 속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영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Happily ever after' 이후에 영웅의 삶보다 못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이 사회에서 내가 가진 조건들로

그걸 이뤄낼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지.

나뿐 아니라 우리 세대 모든 젊은이가 그래.

그렇게 계속 삶을 유지하는 게

자살하는 것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란 걸 알아.

그렇다고 삶을 선택해야 해? 



소설 《표백》 속의 청년들은 우리 세대가 이루지 못할 '영웅적 삶'에 집단 자살이란 폭력적인 방식으로 균열을 내고자 한다집단자살공모의 중심에는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여자 '세연'과 자살을 예고하는 인터넷 사이트 '와이 두 유 리브 닷컴(whydoyoulive.com)'이 있다자살을 행하려는 사람들은 ‘와이 두 유 리브 닷컴에 유서를 작성한 뒤예고한 날짜에 ‘의식을 치른다그리고 너무도 평범해 영웅을 꿈꿀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주인공은 번번이 과거 자신과 집단자살공모를 계획했던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한다승자가 될 수 없다면아무리 돌을 던져도 모두 삼켜버리는 표백의 세상을 고발하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적인 사건 그 자체가 되면 된다.

 

허나 우습게도 그렇게 집단자살만을 향해 달려온 소설 속 주인공은 결국 죽음을 포기한다. 《표백》은 스스로 시작한 '집단자살공모로라도 표백의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픈 젊은이들'이란 이야기에 대해 명징한 해결책을 주는 대신 생경한 결말을 독자에게 안겨주고 마침표를 찍는다. 어쩌면 누군가는 책장을 덮으며 다소 허탈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너도 시대가 요구하는 영웅이 되라'고 등을 떠미는 세상의 부추김이나, 장엄하고 극단적인 결말을 맺길 원하는 죽음의 충동 그 어느 쪽에도 휘둘리지 않은 채, 살아갈 이유를 찾기로 한 주인공의 선택을 존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세상은 승리하든 패배해서 죽음을 택하든, 굽히지 않고 자신의 길을 선택한 이들을 영웅으로 기록한다. 'Happily ever after'로 끝나는 것이 아닌, 그 이후의 길고 지리한 삶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기로 한 주인공은, 어쨌든 자신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조금은 더 성장했다.





표백
(2011)

장강명

*2011년 한겨레문학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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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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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영 기자 alreadyblues@gmail.com

편집/ 이승한 에디터 tintin@iamtint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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