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실수, 두 번은 우연, 세 번은 필연. 네 번은… 계폭?

국민저널 기사 2014.04.24 06:31

한 번은 실수, 두 번은 우연, 세 번은 필연. 네 번은… 계폭?

- 밤 사이에 있었던 법학관 페이스북 계정 논란 총정리.txt








*계폭: '계정 폭파'의 준말. 여기서 '계정'은 법학관 페이스북 계정을 가리킨다.  


한 번은 실수, 두 번은 우연이지만 같은 일이 세 번 반복된다면 그건 필연이다.


'법학관'이란 이름으로 페이스북 계정을 운영하고 있는 유저는 올해 2월부터 3월까지, 해당 계정에 전라도 신안군에서 벌어진 염전 섬노예 사건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올리며 이를 '전라도 섬노예 사건'이라 호칭했다. 적잖은 학생들이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킨다며 불쾌감을 표하자, 해당 유저는 사과글을 올렸다. '나도 지역감정은 싫으나, 해당 지역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결탁한 사건으로 보여서 개인의 문제로 볼 수 없다 판단해 '전라도 섬노예 사건'이라 지칭했다’는 요지의 글이었다. 전라도의 면적은 남북도를 합쳐 대략 2만 평방킬로미터. 신안군의 면적은 655 평방킬로미터다. 해당 유저는 신안군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전라도 섬노예 사건'이라 호명함으로서 전라도 전체의 문제로 둔갑시켰다. 처음 일어난 일, 여기까지는 처음 있는 일이니 실수려니 하고 넘어갔다.







2014년 4월 1일 만우절, 법학관 계정은 만우절 거짓말이라며 '동성과 결혼'이라는 개인정보를 올렸다. 국립국어원이 '사랑'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에서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로 도로 후퇴시킨 것으로 한창 논란이 빚어지고 있던 때였다. 그 '거짓말'에는 누군가에겐 동성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결혼을 꿈꾸는 것은 너무도 큰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것에 대한 고려는 하나도 엿보이지 않았지만, 두 번째 일어난 일, 여기까지도 우연이겠거니 하고 지나갔다. 뭐, 성소수자에 대한 인권감수성이 조금 무딜 수도 있겠지. 국립국어원조차 꼬리를 내리고 후퇴한 마당에.








2014년 4월 15일, 해당 계정은 한 학생이 찍은 동영상을 공유했다. 국제관 화장실에서 버젓이 담배를 태우는 남학생들을 찍은 동영상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금연구역인 화장실 안에서 담배를 태우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자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때에, 법학관 계정은 동영상을 공유하며 ‘한국학생? 외국인학생?’이라는 코멘트를 붙인다.  물론 해당 동영상엔 중국어로 추정대는 대화가 함께 녹음되어 있다. 그러나 그 대화가 화장실 옆 칸에서 들려온 소리인지, 아니면 담배를 태우는 이들의 대화인지 동영상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그 대화가 담배를 태우던 이들의 대화였어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법학관 계정은 단 한 줄의 글로 문제를 ‘매너 없는 흡연자 vs. 그렇지 않은 모든 이들’의 구도에서 ‘외국인 학생 vs. 한국인 학생’의 구도로 둔갑시켰다. 세 번째. 지속적으로 표출된 편협함은 한 가지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계정을 운영하는 사람은, 분명 어떠한 편견에 사로잡힌 이라고.









필연은 분명한 결과로 이어진다. 전국이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트라우마를 앓고 있던 24일 새벽, 해당 계정은 실종자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의미로 네티즌들이 SNS 등에 올리던 '노란 리본' 프로필 사진을 자신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게시했다. 여기까진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해당 계정은, 하필이면 '일간베스트 저장소'(이하 일베)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올리며 이렇게 묻는다. “기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건 전 국민이 바라는 점일 겁니다 아래의 노랑리본이 왜 불쾌함을 주는 건지..?”








국민대학교 네티즌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해당 유저는 결국 사과문을 게재했다. 자신이 일베를 다니긴 하지만 자신은 고 노무현 대통령을 존경하며, 고인드립(고인을 비하하는 농담)을 싫어하고, 진심으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건을 애도하는 마음에서 노란 리본 사진을 올렸는데 그로 인해 사람들이 불쾌해 할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일베 유저라고 모두가 패륜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비극을 조롱하는 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실제로 해당 이미지를 만든 일베 유저 또한 '일베 내에서도 추모의 뜻을 담아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도 있으니 그들이 커뮤니티 안에서 쓰라고 만든 이미지인데, 일베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고인드립이라 취급 당하는 게 불쾌하다'는 요지의 불만을 이야기 한 바 있다. '법학관' 계정만 해도 그렇다. 해당 계정은 작년 12월 말 코레일 민영화 저지 투쟁을 지지하는 요지의 글을 올린 적도 있다. 혹자는 '중간에 계정을 운영하는 이가 바뀐 것 아니냐'는 추정도 하고, 누군가는 '세계관이 일관되지 못한 사람 같다'는 말도 하지만, 해당 계정의 유저가 직접 밝히지 않는 이상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 방법은 없다.


하지만, 서두에 쓴 것처럼 한 번은 실수, 두 번은 우연이지만 같은 일이 세 번 반복된다면 그건 필연이다. '전라도 섬노예 사건' 발언 논란, '동성과 결혼'을 재미있는 농담의 범주로 올린 만우절, 외국인 학생에 대한 어떤 편견을 강화시켰던 흡연 동영상, 그리고 인터넷을 수놓은 수많은 노란 리본의 이미지 중 하필 일베에서 날아온 리본을 올린 지난 새벽까지. 분명한 방향성을 가진 어떤 편협함이 그렇게 세 번을 넘어 네 번 반복되었다.


이런 발언을 평범한 개인이 SNS 상에서 일삼았다면, 그저 '세계관이 편협한 사람이구나' 정도의 반응을 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의를 다루는 학문인 법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법학관'의 이름을 빌려온 계정에서 이런 글이 올라온다면, 그건 분명 어떤 징후다. 자신이 어깨에 짊어진 이름이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 알지 못하고, 사적 개인의 편협한 세계관을 공적인 건물의 이름을 빌려 온 계정에서 표출하며, '그것이 뭐가 문제느냐'고 되려 반문하는 이를 보는 당혹감. 우리는 그 앞에서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나 자신의 행동이 지닐 파급력을 가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 사이에도 도처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섬뜩함을 느낀다.








수많은 항의를 받은 해당 계정은 24일 새벽 '물의를 빚어 죄송하다'는 입장을 남기고 계정을 삭제했다. 이제 그가 정말 국민대학교 학생이었는지, 졸업생인지, 교직원인지, 혹은 그냥 국민대학교 법학관 건물의 이름을 훔쳐간 타인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물의는 남았는데, 책임을 물을 계정은 꼬리를 자르고 사라진다. 이게 과연 법학관 계정 하나만의 일일까. 사라진 계정의 빈 뒤통수를 바라보며 허망해하는 입맛이 쓰다. 공적 건물의 이름을 빌어 개인의 편협한 세계관을 과시하던 이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흔적도 남기지 않고 숨어 들어갔다.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인터넷 틈바구니 안으로.



이승한 논설위원 tintin@iamtint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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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만든 서가] 시간을 견디는 일, 순간을 살아가는 일 - 신경숙 장편소설 《깊은 슬픔》



자유의지 혹은 선택의 소극적 방어기제라는 차원에서, 나는 운명을 믿는다. 어떤 선택지를 필연적으로 집어 들어야할 때,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실패해도 혹은 성공해도 운명이라는 이름만으로 그것은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의지 밖의 일이 되고 만다. 실패한 데에 따른 변명이나 자기 방어로 쓰이는 경우도 많지만, 이는 그럼에도 최소한의 담담함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의지로 선택한 결정 역시 이 믿음에서 예외일 수 없다.

 

많은 경우, 이 자기합리화는 도저히 손을 써볼 수 없는 사람과의 만남에서 자주 쓰인다.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라고. 운명을 창조하거나 개척하는 혹자들은 한심스럽게 느낄지도 모르지만 어디 타인의 마음이 내 마음 같은가. 이 체념은 그래서 꽤 유용하다. 그리고 이 체념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작동하는 단어라면 '같이 산다'는 말이 있겠다.


나는 "같이 산다"는 말을 좋아한다. 어떤 법적 계약이나 약속으로 이뤄진 공동체, 예컨대 부부나 부모, 혹은 룸메이트가 아닌 타인이라도 자주 "같이 살고 있다"고 말하거나 부르고 싶다. '삶은 순간의 연속'이라는 낡은 명제를 돌이켜봐도 결국, 순간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같이 산다'는 말정도는 붙일 수 있지 않나 싶었기 때문이다.


신경숙 작가의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 장편 소설 《깊은 슬픔》 속에는 이렇게 만들어진 운명이 자신의 생 전체를 흔들게 내버려두는 타인이 나온다. 소설은 '이슬어지'라는 작은 고향 마을을 떠나 함께 도시로 나온 세 남녀의 사랑을 다룬다. 소설 속에 나오는 여자 '은서'는 이 운명을, 사랑을 '불가항력'이라 말한다.

 

세 남녀는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고, 서로가 서로의 '고향'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감히 자신을 떠날 수 없을 거라, 헤어질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모질게 굴어도 '너는 나의 고향'이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 때문에, 나를 떠날 수 없을 것'이라 그렇게 말을 한다.


그들은 버려지지 않을 안락함 속에서 자신들이 속한 사랑의 적당함과 안전한 기분을 즐긴다. 절대로 자신을 떠나가지 않을 대상에게 쏟는 적당한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며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상처 입힌다. 이들은, 어쩌면 운명이라는 불가항력적인 관계에 완벽하게 매몰된다.


한 가지 것에 마음 붙이고 그 속으로 깊게 들어가 살고 싶었지.

그것에 의해 보호를 받고 싶었지.

내 마음이 가는 저이와 내가 한 사람이라고 느끼며 살고 싶었어.

늘 그러지 못해서 무서웠다.

그 무서움을 디디며 그래도 날들을 보낼 수 있었던 건

그럴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어서였지.

하지만 이제 알겠어.

그건 내가 인생에 너무 욕심을 낸 거였어.”


은서는 깊숙했던 운명을 조금씩 뱉어내고, 이를 욕심이라고 선언한다. 이들은, 결국 서로를 떠나보냈을까? 아니면 운명의 불가항력을 미리 엿보고 '어쩔 수 없다'며 이를 포기했을까소설의 결말은 명료하지만, 작가는 그 판단을 독자들에게 맡긴다. 결말이 어떻게 되든 이네들을 운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욕심이겠지만 많은 이들이 떠나거나 조금씩 비껴나는 인연에, 조급함이 가득차는 계절에,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조금 더 관대했으면. 우리는 조급함으로 끝없는 만남의 바다를 떠다니거나,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만다. 이것이 어쩌면 끝이라, 운명의 종말이라 생각하면서. '언제 밥 먹자'든지, '앞으로는 친구로 지내자' 같은 어떻게든 여지를 남기지만, 결국은 유효하지 못한 끝인사가 아닌, 우리는 운명이라는 든든함과 기억을 지고 계속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거다.

 

신경숙 작가는 소설 《깊은 슬픔》 서문 끝에 "힘겨운 날, 세상에 당신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사랑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 이들에게 바친다"고 덧붙인다. 모든 관계가 뜻대로 되지 않았더라도, 한 시절 속에서 너 역시 기억할만한 순간을 함께 살았던 운명이었노라,  생각하면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저 삶을 견디는 미련한 처세술일 뿐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운명은, 어쩌면 이토록 작은 곳에 있다.







깊은 슬픔
(1994)

신경숙

 

(클릭하시면 상세 도서정보로 연결됩니다.) 


문학동네 (1994)

 811.32 신146ㄱ v.1

 811.32 신146ㄱ v.2

 

 

유지영 기자 alreadyblues@gmail.com

편집이승한 에디터 tintin@iamtint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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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대학교 학생자치언론 <국민저널> 웹진 <:> 동시 연재되던 [우연이 만든 서가] <국민저널> 연재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그 동안 [우연이 만든 서가]를 아껴주신 <국민저널>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의 [우연이 만든 서가]<:> daasi.net 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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