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해봐서 아는데] 난 지금 시험을 치는 게 아니야, 직감에 손을 맡기는 거지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난 지금 시험을 치는 게 아니야, 직감에 손을 맡기는 거지


본격 기자 체험 칼럼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 두 번째, 정인훈 기자의 중간고사 일지


‘가을.’ 조용히 소리 내어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이 가슴을 울리는 계절이다. 머리 위에서 작열하던 태양은 부쩍 높아진 하늘만큼 물러나고, 코끝에 선선한 공기가 맺힌다. 적당한 바람과 구름, 햇살이 몸을 부대끼며 그려내는 저녁 석양은 그 어느 풍경보다 아름답다. 그리고 때마침 찾아온 중간고사.


이런 망할, 중간고사라니.


우리는 도대체, 왜, 하필, 계절의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 순간에 중간고사를 봐야 한단 말인가.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면 가을은 저만치 도망가고 금세 겨울이 될 것을 아는데.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랬다. 어차피 가을을 제대로 즐기기는 그른 마당에, 본 기자 각 잡고 ‘중간고사’에 대한 살아있는 기록을 남긴다. 5월의 꽃 ‘예비군 훈련’ 편에 이어 근 반년 만에 돌아온 전격 기자 체험 코너, ‘내가 해봐서 아는데’ 중간고사 편이다.


금요일(1):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학생증이 망가진 학생은 처음일 텐데


아침 9시. 여느 아침과 다를 게 없지만, 어쩐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진다. 이것이 시험의 압박인가. 양치하며 오늘 해야 할 공부를 생각해 본다. ‘오늘은 월요일에 볼 과목 두 개를 끝내리라.’ 목표는 번잡하게 짜면 안 된다. 단순하고 명료하게.


이어폰을 끼고 집을 나서 전철을 탄다. 시험기간이라 그런지, 뭔가 손에 들고 보는 학생들이 많다. 스마트폰으로 웹툰과 SNS를 번갈아 보는 자신이 무안해진다. 책을 꺼내야 하나. 가방을 비스듬히 메다 말고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 “어차피 오늘 온종일 공부할 건데, 학교 가는 40분 정도는 좀 자유롭게 있어도 좋지 않을까?” 그래. 머리도 좀 쉬어줘야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법이다. 가방을 바로 메고 웹툰에 집중하고 있노라니 어느덧 학교 앞이다.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지? 내가 몇 번 버스로 갈아타고 왔더라? 유달리 번개같이 흘렀지만 참 달콤한 40분이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오늘의 마지막 자유, 40분.


“오늘 밤 11시가 되기 전에는 이 문을 나서지 않으리.”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정문을 지나 오르막을 오른다. 수업보다 일찍 도착했으니, 남은 시간은 성곡도서관에서 시험을 대비해야지. 회전문을 지나 학생증을 입구 카드 리더기에 찍는다. 삑. 소리가 나야 하는데, 안 난다. 두 번, 세 번 시도해도 매한가지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공부하겠다고 도서관에 들어가려는 날 학생증이 망가진 것이다. 회전문을 돌리며 들어갈 때는 가슴 속에 포부가 가득했는데, 상황이 이러고 보니 나오는 길은 막막하기 짝이 없다. 어디로 가야 하나. 동네 도서관에라도 가야 하나? 뚜렷한 정답은 없고, 기자의 발길은 도리 없이 강의실로 향한다.


시험기간이라 그런지, 평소엔 기차 화통이라도 삶아 먹은 듯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정숙을 유지하고 있다. 엠씨스퀘어가 따로 없다. 그 위압감에 짓눌려 기자 또한 공부할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 과연 인간의 집중력이 최고로 발휘되는 시간, 시험 기간 수업 시작 30분 전답다. 교재를 한 권 끝장내도 정말 아무런 느낌이 없을 것 같다.


중간고사가 없는 수업, 평소처럼 수업이 시작된다. 집중력을 너무 끌어 올렸던 걸까. 평소엔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던 수업 내용이 한 자 한 자 뇌리에 각인된다. 교수님의 팔의 각도, 분필의 궤적, 말씀의 템포와 쉼표의 위치까지 기억에 남는다. 누가 그랬나. 시험기간에는 벽만 쳐다봐도 재미가 꿀이라고. 시험기간엔 시험과 무관한 모든 것이 재미있다. 그렇게 즐겁게 수업을 마치고 나니, 다시 시험공부의 압박이 어깨를 짓누른다.


금요일(2):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날 묶어뒀던 교재를 벗어 던진다


학생증 때문에 못 들어간다 생각하니, 성곡도서관이 두고 온 고향처럼 그립다. 공부할 장소를 찾는 것이 급선무다. 디자인 도서관, 법학관 도서관, 북악관 열람실 등 많은 장소가 떠올랐지만, 제보에 따르면 이미 만원이 된 지 오래란다. 기자는 고민 끝에 소속 학과 자료실로 가기로 한다. 거기라면 각종 학술 서적도 있고, 답답한 도서관과는 달리 열린 공간이라 쾌적할 테다. 과연 들어서니 기자와 비슷한 목적으로 자료실을 찾은 몇몇이 정숙을 유지 중이다. 기자는 틀리지 않았다. 여기서 기필코 월요일에 볼 두 과목을 마무리하리라.



△ 학과 자료실에서 "나는 틀리지 않았다" (서울=국민저널/정인훈 기자)


30분쯤 흐르자, 무음으로 전환해 둔 스마트폰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별거 없겠지. 공부나 하자. 무슨 긴급한 연락이 왔을지 어떻게 알아? 30분에 한 번 체크는 해야 하지 않을까? 기자의 손이 자석처럼 스마트폰을 향한다. 인간은 30분 동안 얼마나 많은 말을 할 수 있는지. 그 짧은 찰나에 엄청난 양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평소라면 대충 읽고 치웠겠지만, 시험기간을 맞이한 기자의 집중력은 극에 달해 있었다. 단체 채팅방을 비롯한 모든 이야기에 성실하게 대답을 해주다 보니 벌써 30분이 흘렀다. 이러면 안 된다. 기자는 강철로 된 무지개와 같은 강한 의지로 스마트폰을 다시 뒤집어 놓고 책을 펼친다. 오늘 안으로 반드시 두 과목을 끝내야 하…아…


화들짝. 잠시 졸았다. 기자의 고개가 졸음에 겨워 넘어가는 게 안쓰러웠는지, 친구가 커피나 한 잔 마시고 오자고 제안한다. 그래, 시험기간에 이렇게 졸음을 쫓으며 친구와 나눠 마시는 커피가 또 백미다. 바쁜 와중에 잠시 짬 내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 순간…이 왜 2시간씩이나 걸린 거지? 이상한 일이다. 그냥 커피 한 잔과 담소가 왜 2시간이나 잡아먹은 걸까. 시간은 벌써 7시.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다시 책에 집중한다.


커피를 마시면 잠이 안 온다고 한 놈은 대체 누군가. 아무리 마셔도 혈당만 치솟고 졸음은 가시질 않는다. 공부를 하는 건지 잠을 이기려는 건지 구별은 안 되지만, 어쨌든 책을 보며 세 시간을 버텼다. 그렇게 열 시가 되자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한 시간만 더 하면 ‘11시가 되기 전엔 정문을 나가지 않으리’란 목표를 채울 수 있는데. 원래 목표가 ‘월요일에 시험 볼 두 과목을 끝내는 것’이었단 건 잊은 지 오래. ‘11시에 나가면 12시에나 집에 갈 텐데,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기자는 무의미한 갈등에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귀가를 결단한다. 체력은 국력이다.



△ 북악관 앞이다. 저 멀리서 본부관 불빛이 보인다. 귀가하기로 결정했다. 체력은 국력이다. (서울=국민저널/정인훈 기자)


토요일: 어쩜 이렇게 하늘은 더 파란건지

오늘따라 왜 바람은 더 완벽한지


눈을 뜨니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지만 나와는 무관한 일. 스스로를 다스리며 목욕재계하고 보니, 막상 공부할 곳이 애매하다. 독서실은 너무 비싸고, 동네 도서관은 이미 중고생과 고시생으로 가득 하다는 친구의 메시지에 한숨부터 나온다. 고민 끝에 기자는 동네에서 사업하는 친구 사무실을 떠올린다. 집에서 5분 거리, 주말이니 비어있을 테다. 혼자 쓰는 사무실은 독서실이나 학교 도서관보다 좋을 것이 틀림없다. 친구에게 물으니 흔쾌히 허락한다. 기자는 삼선 슬리퍼와 편한 반바지, 목 늘어난 티셔츠 차림으로 친구 사무실로 향한다.


사무실에 들어서 종이컵에 커피를 타며, 오늘의 목표를 상기한다. ‘오늘은 기필코 월요일에 보는 첫 번째 시험을 완전히 정복한다.’ 열심히 한 시간쯤 책을 읽었을까. 텅 빈 사무실을 채우는 토요일 오전 11시의 가을 햇살이 기자의 가슴을 덥힌다. 토요일이라 그런 건지 가을이라 그런 건지. 뒤숭숭한 마음에 창밖을 보니 주말 가을 하늘은 화가 날 만큼 청명하다. 놀러 나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르는 그 순간, 1학기 성적이 뇌리를 스치며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는다. 다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친다.


몇 시간여의 정적을 깬 건 꼬르륵 소리였다. 스멀스멀 피어나는 허기, 기자는 사무실 건물 1층 편의점으로 향한다. 뭐 먹을까 하는 고민은 시험을 앞둔 대학생에겐 사치다. 사온 것은 김밥과 컵라면. 시험기간엔 이렇게 먹어주는 것이 공부에 대한 예의라 배웠다. 음식을 음미할 시간 따윈 없다. 꼬르륵 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배 속에 뭔가 넣어 주는 것일 뿐. 배가 고파야 머리가 맑아진다고 하지 않던가.



△ 시험기간 동안 기자의 고정 저녁식사 이렇게 먹어주는 것이 시험에 대한 예의라 배웠다 (서울=국민저널/정인훈 기자)


저녁 7시, 슬슬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휴일의 정점, 휴일의 꽃, 휴일의 골든타임 토요일 저녁 7시. 약속을 잡으려는 친구들의 메시지가 스마트폰을 울리기 시작한다. 정녕 안 나올 거냐고 거푸 묻는 친구들의 기세가 흡사 와룡을 스카우트하려는 유비만큼 끈덕지다. 거절을 못 하는 선량한 성정의 기자는 견디다 못해 스마트폰을 뒤집어 놓는다. 좋다. 나는 유혹을 이겼다. 진동 따윈 울리지 않는다. 무음이니까. 욕은 먹어도 상처는 남지 않는다. 친구니까. 하지만 망한 시험 성적은 평생 상처로 남을 것이다. 성적이니까.


오후 9시, 집중력에도 한계가 온다. 공부엔 끝이 없다지만 이만하면 얼추 끝난 거 아닌가 하는 건방이 마음을 수놓는다. 아까 덮어 놓았던 스마트폰을 슬쩍 되돌려본다. 부재중 통화 9통, 메신저 메시지 300개. 부재중 통화야 올 사람들에게만 온 것일 테고, 메시지는 필시 친구를 모른 척한 기자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으로 점철되어 있을 테니 읽지 않고 도로 덮어둔다.


스마트폰을 덮고 텅 빈 사무실을 둘러보다가, 불현듯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나는 왜 친구들에게 욕을 먹어가며 이러고 있는가. 내 힘들었던 군 생활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헤어진 구 여친은 지금쯤 어느 하늘 아래 그 누구와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집중력은 연기처럼 흩어진다. 오늘은 그래도 많이 했다고 자신을 위안하며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선다.


일요일: 이제는 책상이 난지 내가 책상인지도 몰라

책을 펴기도 전에 덮는 이런 상황은 뭔가


시험기간의 마지막 주말인 일요일이다. 오늘은 장소를 바꿔 성곡도서관을 가기로 한다. 마침 친구가 학생증을 빌려준단다. 시험기간 주말만큼은 차를 빌려 써도 좋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차키를 들고 집을 나선다. 대중교통과 환승으로 말미암을 피로 없이 깨끗한 정신으로 시험 준비를 마무리할 생각에 가슴이 부푼다. 드라이브를 시작한 지 10분, 아버지께 전화가 온다. 군대 간 동생이 휴가 나와 가족 외식이 잡혔으니 집으로 복귀하라는 전언이다. 사랑하는 동생이 휴가를 나왔다는데 어쩔 것인가. 학업에 대한 열정은 외식 메뉴에 대한 설렘으로 바뀐다.


열심히 먹고 나니 포만감과 왠지 모를 피곤함, 그리고 학교에서 공부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은 다 망했다는 불안이 밀려온다. 결국, 또 친구 사무실로 향한다. 내일이면 이 모든 게 끝이니 오늘만 힘내면 된다. 이렇게 한 시간 한 시간 채우면 되겠지. 그렇게 한 시간 한 시간을 채우다 정신을 차려보면 자다 일어난 자신을 발견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내가 잠을 잔 것인지 잠이 나를 잔 것인지 알 수 없다.


쓴 입맛을 다시고, 물처럼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며 막판 스퍼트를 붙인다. 마지막 날이니 더 물러날 도리가 없는 탓인지 아니면 터가 좋아서인지, 유독 친구 사무실에서 공부가 잘된다는 느낌이 든다. 이곳은 이제 내 개인 독서실이 될 것이다. 친구가 사무실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사업이 나날이 번창하길 기원하며, 어떻게든 월요일 시험 두 번째 과목까지 끝마친다. 금요일에 끝냈어야 할 일을 주말 내내 끌었지만, 괜찮다. 시험이 원래 다 이렇다.


시험 당일: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A인 줄 알았는데


대망의 중간고사 날 아침이다. 전철에서부터 그간 정리해둔 노트를 보면서 학교에 간다. 내가 결코 준비가 부족해서 이러는 게 아니다. 완벽한 마무리를 위한 것이다. 평소와는 달리 학교 가는 걸음마다 비장함이 뚝뚝 떨어진다.


누군가 ‘이 대학 시험기간은 언제인가’ 묻거든 눈을 들어 등굣길 학생들의 상태를 보게 하라. 평소 잔뜩 신경 쓴 신발로 패션을 추구하던 남학생들은, 시험기간엔 ‘편한 게 장땡’을 외치며 슬리퍼로 환승한다. 깔창 족들도 이때만큼은 깔창에서 내려온다. 여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메이크업 베이스-파운데이션-컨실러-콤펙트-아이셰도우-아이라이너-마스카라-립밤-미스트 순서의 정성 들인 메이크업은 없다. 오로지 CC(씨씨)크림과 야구모자만이 그들을 구원한다. 슬리퍼와 모자로 가득 찬 강의실의 풍경이 폭풍전야의 긴장감을 알려준다. 기자 또한 엄숙한 마음으로 입실한다.


교수님께서 들어오신 후 정시에 시험을 본다.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을 포기한 이들이 하나둘씩 일어선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답지를 적고 나가는 그들의 얼굴엔 해탈한 자의 미소가 어려 있다. 기자는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답지를 제출하고 강의실을 나선다. 분명 막힘없이 쓴 것 같은데,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잘 봤다’는 확신 따윈 들지 않는다.


아무튼 홀가분하다. 어쩐지 A학점이 멀어지는 것 같긴 하지만, 끝난 건 끝난 거니까. 주말 간의 고생도 눈 녹듯 사라진 듯하다. 딱 5분 동안만. 그동안 미뤄온 산더미 같은 과제들의 존재를 자각하기 직전, 그 5분의 평화. 시험장에서 떠난 기자는 다시 노트북을 들고 과제를 할 장소를 찾아 나선다. 학생증이 망가졌으니 성곡도서관은 못 갈 것이고, 또 학과 자료실을 가야 하나. 다시 서성이는 기자의 귓전에 오래된 노래가 울려 퍼진다.


조금씩 삭아만 간다

푸르기 만한 대학생활일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간다

매일 과제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공부하며 늙고 있구나



글, 취재/ 정인훈 기자 jungihoon@hanmail.net

편집/ 이승한 에디터 tintin@iamtint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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