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2 신입기자 공모 합격자 기사] ③ 밀양, 그리고 오래된 질문들

국민저널 기사 2013.10.24 13:32



“그런데 도대체 밀양이 뭐가 문제인 거죠?”


4억짜리 땅을 6천만 원만 받고 넘기라는 정부의 ‘보상 계획’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밀양에 건설 예정인 송전탑이 왜 더 위험한지, 참여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이 논란이 정파적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의심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같은 설명이 반복된다. 경남 밀양에 세워질 765kV(76만 5천 볼트) 송전탑을 둘러싼 한국전력과 지역 주민 간의 분쟁은 8년이나 지속됐지만, 무엇이 문제냐는 질문 앞에서 논의는 언제나 제자리로 다시 돌아온다. ‘지역 이기주의’, ‘외부 세력의 선동’, ‘국론 분열’과 같은 자극적인 단어들 속에 본질은 희미해지고, 말 잔치에 질린 사람들은 밀양 송전탑 문제 자체로부터 관심을 끊는다.

 

송전 전압은 높을수록 위험해진다. 수도권에 들어선 송전탑들의 전압은 154kV(15만 4천 볼트). 밀양에 들어설 765kV 송전탑은 그보다 18배 더 많은 전기를 수송한다. 송전 전압이 높으면 위험성도 함께 올라간다. 345kV 송전탑이 지나는 충남 청양군조차 몇 년 새 암환자 수가 급증했다. 정부는 울산 신고리 원전에서 수도권까지 전기를 보내려면 손실률을 줄여야 하기에 부득이하게 초고압 선로를 택했다고 했지만, 영남 지역에만 전력을 공급하기로 계획을 바꾼 이후에도 송전탑의 전압은 그대로다. 지역 주민들이 제안한 기존 선로 보완, 선로 지중화, 초전도 케이블 사용 등의 대안은 매번 기각됐다.



 

이 송전탑들은 돌아가는 법도 없다. 높이 150미터, 45층 빌딩 높이의 송전탑은 주민들이 일궈왔던 논밭 한가운데에, 평생을 살아왔던 집 근처에 들어선다. 울산에서 부산 해운대, 기장, 양산, 밀양을 거쳐 경남 창녕까지 이어지는 동안, 다른 지역과는 달리 유독 밀양만은 산으로 우회하는 일 없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터전 근처에 송전탑이 들어선다. “논밭과 민가를 많이 지나가도록 애초에 설계를 그런 식으로 선으로 (한전이) 일방적으로 그어놨다. 주민들의 의사를 수렴한 적조차 전혀 없고, 주민들이 나중에 알고 이걸 민가 쪽으로 내려오는 대신 산 쪽으로 변경해 달라고 했지만, 일체 한 기도 못 옮긴다는 게 한전의 입장이었다.” 밀양이 지역구인 새누리당 조해진 의원의 말이다. (2013년 5월 20일, <CBS> 라디오 인터뷰)

 

부산, 경남 지역의 전기 소비 대비 발전량은 200%가량. 정말 영남 지역만을 위한 것이라면 초고압 송전탑이 들어설 이유도, 인구 초 밀집지역인 부산·울산 지역에만 원전을 12기씩 건설하며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위험부담을 몰아줄 이유도 없다. 결국, 이 많은 전기는 전국 전기 생산량의 50%를 소비하면서 자급률은 3.3%에 그치는 서울로 향한다. 서울이 소비할 전기를 생산하고 수송하기 위해 지방 거주민들에게 고통을 분담시키는 것이라는 가정 없이, 이 부조리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니 밀양의 문제는 오늘날 서울을 살고있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보시는 사진들은 <국민저널> 권용석 기자가 지난 10월 4일~5일에 걸쳐 진행된 탈핵희망버스 현장에서 취재해 온 밀양의 모습들이다. 우리는 이 사진들에 몇 가지 오래된 질문들을 함께 담아 독자 여러분께 띄어 보낸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에게 피해를 전가하는 것은 정의로운가. 민주정을 채택한 국가가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때, 이해 당사자의 의사를 묻고 반영해야 하는 최소한의 선은 어디까지인가. 사람과 효율 중에 더 우선시되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부디 이 사진들이 그 오래된 질문들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기회가 되길 바란다.


글/ 이승한 편집국장 tintin@iamtintin.net

사진, 취재/ 권용석 기자 e12345kr@gmail.com

 

(권용석 기자의 [2013-2 신입기자 공모 합격자 기사]는 본 기사로 갈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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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만든 서가] 살고 싶으면 친절한 게 좋단다 - 장마르크 로셰트 外 <설국열차>


스포일러 경고: 영화 <설국열차>와 원작 그래픽 노블 <설국열차>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는 열차가 영원한 겨울의 광활한 백색 세상을 지구 이편에서 저편 끝까지 가로지른다. 바로 1001량의 설국열차다. 문명의 마지막 보루!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는 열차 안에서 과연 정의롭고 친절한 사람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여기서 살아남는다는 건 육체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렇다는 걸 의미한다. 이 글은 앞선 질문으로 시작해 그럴 수 없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식물인간이나 뇌사 상태에 빠진 사람이 죽음과 삶 사이에 남아있다고 간주한다. 육체는 지상에 붙어 있지만 정신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선, 그들은 이미 삶의 경계 밖에 있다.

 

지금은 당연한 듯 누리고 있는 자유가 일순간에 사라지게 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아비규환이 찾아온다. 영화 <설국열차>의 말미, 커티스는 열차 가장 앞 엔진칸의 문턱까지 향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행했고 목격했던 아비규환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뿐이다. 커티스가 지나왔다던 아비규환의 흔적은 커티스의 회고로밖에는 확인할 길이 없다. 관객들은 오로지 커티스의 말을 듣고 그 폭동을 상상할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완벽하게 모든 걸 털어놓을 만큼 정리된 커티스의 기억은 현재가 아닌, 반성할만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혼자 사유하고 정리하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회는 적어도 굴러가는 열차 꼬리칸 내에서는 사치다. 원작 그래픽 노블 <설국열차>의 도입부, 꼬리칸 안에서 일흔 살 생일을 맞이한 노인은 잠시만 혼자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사람들은 노인의 부탁을 들어줬고, 혼자 남게 된 노인은 그제야 열차 천장에 목을 매단다. 살아있다는 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시공간 속에서는 남겨질 역사도 기대할 삶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지금의 인류 같은 인격이 유지될 수 있다는 건 너무 큰 기대일지 모른다.

 

그래픽 노블 <설국열차>는 이 지점을 중심에 두고 서술한다. 인격을 갖출 환경이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각자 열차 속에서 생활하기 가장 적합한 인류를 만들어 나간다. 섹스에 탐닉하고 종교만으로 살아가거나, 자기 앞에 놓인 생을 처리하느라 분주하다. 원작 <설국열차> 1부의 주인공 프롤로프는 꼬리칸에서 맨 앞칸까지 1001량의 열차를 거치게 된다. 고난을 겪으며 끝에서 끝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그는 영화의 주인공 커티스의 전신으로 추정되지만, 프롤로프는 커티스처럼 정의롭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프롤로프를 구해 주려던 앞칸 여자 아들린은, 곤경에 처한 자신을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프롤로프의 행동 앞에서 분노에 찬 눈물을 흘린다. 그녀가 있던 앞칸에서처럼 위기에 처한 여자를 구해줄 일말의 남성적 책임감이라는 게 존재하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롤로프는 앞칸까지 향하며 인간보단 동물에 더 가깝게 행동한다. 꼬리칸을 보지 못하고 자란 아들린은 프롤로프를 이해할 수 없다. 생존을 위한 치열함으로 가득 찼던 꼬리칸에서는, 어쩌면 지금의 인류가 지닌 친절 같은 건 무의미해진 게 아닐까.

 

앞칸에 도착한 프롤로프는 기계실을 지키는 노인을 발견한다. 가벼운 농담과 압도적인 권위를 보이던 영화 속 윌포드는 원작에 없다. 대신 열차 뒷칸과 의사소통이 단절돼 홀로 남아 기계에게 말을 걸기에 이른 노인만이 있을 뿐이다. 노인은 자신의 사후에도 열차가 달릴 수 있게 프롤로프에게 기계를 맡긴다. 다시 꼬리칸으로 돌아갈 이유도, 별다른 선택도 없었던 프롤로프는 이를 받아들인다.

 

아트 슈피겔만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경험한 자신의 아버지를 토대로 그린 그래픽 노블 <>에서, 아버지는 아트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살고 싶으면 친절한 게 좋단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는 분명 대단한 존재지만, 아트는 아버지가 가스실에서 죽어나간 다른 유대인보다는 운이 좋았다고 기록한다. 마치 생존을 점지하는 여러 상황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친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사람들의 친절이나 정의는 이 시대를 살아남기 위한 진화의 산물이다. 고도의 문명과 규율로 지탱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친절과 정의는 생존을 담보하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것이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사회에서, 친절과 정의는 그 힘을 잃는다. 영화 <설국열차>의 커티스는 열차의 꼬리칸에서 생존하기에 지나치게 친절하고 정의롭다.

 

 

 





설국열차
Le Transperneige
(1984-2000)

장마르크 로셰트 
Jean-Marc Rochette
쟈끄 로브 Jacques Lob
벵자맹 르그랑 Benjamin LeGrand

 

(클릭하시면 상세 도서정보로 연결됩니다.) 


현실문화연구(2009)
808.90944 로54ㅅ 


 

 

/ 유지영 기자 alreadyblues@gmail.com

편집/ 이승한 에디터 tintin@iamtint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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