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만든 서가] 시간을 견디는 일, 순간을 살아가는 일 - 신경숙 장편소설 《깊은 슬픔》



자유의지 혹은 선택의 소극적 방어기제라는 차원에서, 나는 운명을 믿는다. 어떤 선택지를 필연적으로 집어 들어야할 때,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실패해도 혹은 성공해도 운명이라는 이름만으로 그것은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의지 밖의 일이 되고 만다. 실패한 데에 따른 변명이나 자기 방어로 쓰이는 경우도 많지만, 이는 그럼에도 최소한의 담담함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의지로 선택한 결정 역시 이 믿음에서 예외일 수 없다.

 

많은 경우, 이 자기합리화는 도저히 손을 써볼 수 없는 사람과의 만남에서 자주 쓰인다.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라고. 운명을 창조하거나 개척하는 혹자들은 한심스럽게 느낄지도 모르지만 어디 타인의 마음이 내 마음 같은가. 이 체념은 그래서 꽤 유용하다. 그리고 이 체념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작동하는 단어라면 '같이 산다'는 말이 있겠다.


나는 "같이 산다"는 말을 좋아한다. 어떤 법적 계약이나 약속으로 이뤄진 공동체, 예컨대 부부나 부모, 혹은 룸메이트가 아닌 타인이라도 자주 "같이 살고 있다"고 말하거나 부르고 싶다. '삶은 순간의 연속'이라는 낡은 명제를 돌이켜봐도 결국, 순간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같이 산다'는 말정도는 붙일 수 있지 않나 싶었기 때문이다.


신경숙 작가의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 장편 소설 《깊은 슬픔》 속에는 이렇게 만들어진 운명이 자신의 생 전체를 흔들게 내버려두는 타인이 나온다. 소설은 '이슬어지'라는 작은 고향 마을을 떠나 함께 도시로 나온 세 남녀의 사랑을 다룬다. 소설 속에 나오는 여자 '은서'는 이 운명을, 사랑을 '불가항력'이라 말한다.

 

세 남녀는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고, 서로가 서로의 '고향'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감히 자신을 떠날 수 없을 거라, 헤어질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모질게 굴어도 '너는 나의 고향'이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 때문에, 나를 떠날 수 없을 것'이라 그렇게 말을 한다.


그들은 버려지지 않을 안락함 속에서 자신들이 속한 사랑의 적당함과 안전한 기분을 즐긴다. 절대로 자신을 떠나가지 않을 대상에게 쏟는 적당한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며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상처 입힌다. 이들은, 어쩌면 운명이라는 불가항력적인 관계에 완벽하게 매몰된다.


한 가지 것에 마음 붙이고 그 속으로 깊게 들어가 살고 싶었지.

그것에 의해 보호를 받고 싶었지.

내 마음이 가는 저이와 내가 한 사람이라고 느끼며 살고 싶었어.

늘 그러지 못해서 무서웠다.

그 무서움을 디디며 그래도 날들을 보낼 수 있었던 건

그럴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어서였지.

하지만 이제 알겠어.

그건 내가 인생에 너무 욕심을 낸 거였어.”


은서는 깊숙했던 운명을 조금씩 뱉어내고, 이를 욕심이라고 선언한다. 이들은, 결국 서로를 떠나보냈을까? 아니면 운명의 불가항력을 미리 엿보고 '어쩔 수 없다'며 이를 포기했을까소설의 결말은 명료하지만, 작가는 그 판단을 독자들에게 맡긴다. 결말이 어떻게 되든 이네들을 운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욕심이겠지만 많은 이들이 떠나거나 조금씩 비껴나는 인연에, 조급함이 가득차는 계절에,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조금 더 관대했으면. 우리는 조급함으로 끝없는 만남의 바다를 떠다니거나,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만다. 이것이 어쩌면 끝이라, 운명의 종말이라 생각하면서. '언제 밥 먹자'든지, '앞으로는 친구로 지내자' 같은 어떻게든 여지를 남기지만, 결국은 유효하지 못한 끝인사가 아닌, 우리는 운명이라는 든든함과 기억을 지고 계속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거다.

 

신경숙 작가는 소설 《깊은 슬픔》 서문 끝에 "힘겨운 날, 세상에 당신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사랑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 이들에게 바친다"고 덧붙인다. 모든 관계가 뜻대로 되지 않았더라도, 한 시절 속에서 너 역시 기억할만한 순간을 함께 살았던 운명이었노라,  생각하면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저 삶을 견디는 미련한 처세술일 뿐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운명은, 어쩌면 이토록 작은 곳에 있다.







깊은 슬픔
(1994)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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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1994)

 811.32 신146ㄱ v.1

 811.32 신146ㄱ v.2

 

 

유지영 기자 alreadyblues@gmail.com

편집이승한 에디터 tintin@iamtint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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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대학교 학생자치언론 <국민저널> 웹진 <:> 동시 연재되던 [우연이 만든 서가] <국민저널> 연재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그 동안 [우연이 만든 서가]를 아껴주신 <국민저널>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의 [우연이 만든 서가]<:> daasi.net 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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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만든 서가] Happily ever after 이후의 삶 - 장강명 《표백》




한국에는 '열심히 하면 언젠가 잘 될 거야'라는 이름의 종교가 있다이 종교는 다수의 신자들을 거느리고 있으며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어떤 고난의 길을 거쳐 해당 종교의 신과 영접했는지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다이 종교는 '도무지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성취감' '주어진 시련에 당당히 맞서 자신의 꿈을 이룬 용기'를 복음으로 제시한다해당 종교의 경전은 출간되자마자 전국 서점에 깔리고 세대 구분 없이 소비된다.

 

포교 방식은 다양하고 논리적이다신도들은 입시취업아파트라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세공한 욕망에 기댄다. ‘큰 꿈을 가져라’ 혹은 ‘자신이 진짜로 바라는 것이 뭔지 알고 그것만을 향해 가라는 말씀과 ‘조금만 눈을 낮춰 중소기업에도 취직하라’, ‘20대는 열정으로도 먹고 살 수 있으니 괜찮다는 말씀을 모두 품은 하나의 종교, 나는 이보다 무서운 종교를 본 일이 없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있으면 그 맞은 편엔 회의주의자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다이 회의주의자들은 종교에 의문을 제기하다가 대개 무신론 혹은 비관주의로 빠지거나자신을 지배해줄 다른 종교를 찾아 나선다장강명 작가의 소설 《표백》은 20대인 주인공들이 빠지고만 다른 종교를 이야기한다그들이 빠진 종교는 '내가 발버둥쳐봐야 세상은 바뀌지 않아'이다.

 

"이 사회에서 내가 가진 조건들로 그걸 이뤄낼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지나뿐 아니라 우리 세대 모든 젊은이가 그래그렇게 계속 삶을 유지하는 게 자살하는 것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란 걸 알아그렇다고 삶을 선택해야 해? (중략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친다이른바 표백 세대의 등장이다."

 

'표백 세대'. 무엇도 다 삼키는 거대하고 새하얀 세상에 돌을 던져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에 마주한 세대소설 《표백》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청년들을 '88만원 세대'가 아닌 '표백 세대'라고 정의한다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도 이전 세대가 이룩한 것보다 더 나은 삶을 이룩할 수 없다.

 

현재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20대는아니 고도의 압축 성장을 이룬 대부분의 사회에 살고 있는 청년들은 극소수의 선택된 사람이 아닌 이상 자신의 부모 세대가 누린 수준의 삶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못할 공산이 크다이는 예언이 아닌 통계다양질의 졸업자는 넘쳐나는 반면 그들을 수용할 일자리가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고대 설화 속 영웅의 탄생에도 법칙이 있듯비천한 곳에서 탄생해 경제성장이라는 조력자를 만난 우리 시대의 영웅들은 태평성대를 이루고 현재 한국사회의 단물을 향유하고 있다이들은 영웅이 된 자신의 DNA를 물려받은 아들딸들은 자신보다 좀 더 위대한 길을 걸을 거라 생각한다자신보다 훨씬 좋은 환경 속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영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Happily ever after' 이후에 영웅의 삶보다 못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이 사회에서 내가 가진 조건들로

그걸 이뤄낼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지.

나뿐 아니라 우리 세대 모든 젊은이가 그래.

그렇게 계속 삶을 유지하는 게

자살하는 것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란 걸 알아.

그렇다고 삶을 선택해야 해? 



소설 《표백》 속의 청년들은 우리 세대가 이루지 못할 '영웅적 삶'에 집단 자살이란 폭력적인 방식으로 균열을 내고자 한다집단자살공모의 중심에는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여자 '세연'과 자살을 예고하는 인터넷 사이트 '와이 두 유 리브 닷컴(whydoyoulive.com)'이 있다자살을 행하려는 사람들은 ‘와이 두 유 리브 닷컴에 유서를 작성한 뒤예고한 날짜에 ‘의식을 치른다그리고 너무도 평범해 영웅을 꿈꿀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주인공은 번번이 과거 자신과 집단자살공모를 계획했던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한다승자가 될 수 없다면아무리 돌을 던져도 모두 삼켜버리는 표백의 세상을 고발하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적인 사건 그 자체가 되면 된다.

 

허나 우습게도 그렇게 집단자살만을 향해 달려온 소설 속 주인공은 결국 죽음을 포기한다. 《표백》은 스스로 시작한 '집단자살공모로라도 표백의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픈 젊은이들'이란 이야기에 대해 명징한 해결책을 주는 대신 생경한 결말을 독자에게 안겨주고 마침표를 찍는다. 어쩌면 누군가는 책장을 덮으며 다소 허탈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너도 시대가 요구하는 영웅이 되라'고 등을 떠미는 세상의 부추김이나, 장엄하고 극단적인 결말을 맺길 원하는 죽음의 충동 그 어느 쪽에도 휘둘리지 않은 채, 살아갈 이유를 찾기로 한 주인공의 선택을 존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세상은 승리하든 패배해서 죽음을 택하든, 굽히지 않고 자신의 길을 선택한 이들을 영웅으로 기록한다. 'Happily ever after'로 끝나는 것이 아닌, 그 이후의 길고 지리한 삶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기로 한 주인공은, 어쨌든 자신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조금은 더 성장했다.





표백
(2011)

장강명

*2011년 한겨레문학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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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2011)

811.36 장11ㅍ

 

 

/ 유지영 기자 alreadyblues@gmail.com

편집/ 이승한 에디터 tintin@iamtint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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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만든 서가] 살고 싶으면 친절한 게 좋단다 - 장마르크 로셰트 外 <설국열차>


스포일러 경고: 영화 <설국열차>와 원작 그래픽 노블 <설국열차>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는 열차가 영원한 겨울의 광활한 백색 세상을 지구 이편에서 저편 끝까지 가로지른다. 바로 1001량의 설국열차다. 문명의 마지막 보루!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는 열차 안에서 과연 정의롭고 친절한 사람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여기서 살아남는다는 건 육체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렇다는 걸 의미한다. 이 글은 앞선 질문으로 시작해 그럴 수 없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식물인간이나 뇌사 상태에 빠진 사람이 죽음과 삶 사이에 남아있다고 간주한다. 육체는 지상에 붙어 있지만 정신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선, 그들은 이미 삶의 경계 밖에 있다.

 

지금은 당연한 듯 누리고 있는 자유가 일순간에 사라지게 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아비규환이 찾아온다. 영화 <설국열차>의 말미, 커티스는 열차 가장 앞 엔진칸의 문턱까지 향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행했고 목격했던 아비규환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뿐이다. 커티스가 지나왔다던 아비규환의 흔적은 커티스의 회고로밖에는 확인할 길이 없다. 관객들은 오로지 커티스의 말을 듣고 그 폭동을 상상할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완벽하게 모든 걸 털어놓을 만큼 정리된 커티스의 기억은 현재가 아닌, 반성할만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혼자 사유하고 정리하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회는 적어도 굴러가는 열차 꼬리칸 내에서는 사치다. 원작 그래픽 노블 <설국열차>의 도입부, 꼬리칸 안에서 일흔 살 생일을 맞이한 노인은 잠시만 혼자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사람들은 노인의 부탁을 들어줬고, 혼자 남게 된 노인은 그제야 열차 천장에 목을 매단다. 살아있다는 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시공간 속에서는 남겨질 역사도 기대할 삶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지금의 인류 같은 인격이 유지될 수 있다는 건 너무 큰 기대일지 모른다.

 

그래픽 노블 <설국열차>는 이 지점을 중심에 두고 서술한다. 인격을 갖출 환경이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각자 열차 속에서 생활하기 가장 적합한 인류를 만들어 나간다. 섹스에 탐닉하고 종교만으로 살아가거나, 자기 앞에 놓인 생을 처리하느라 분주하다. 원작 <설국열차> 1부의 주인공 프롤로프는 꼬리칸에서 맨 앞칸까지 1001량의 열차를 거치게 된다. 고난을 겪으며 끝에서 끝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그는 영화의 주인공 커티스의 전신으로 추정되지만, 프롤로프는 커티스처럼 정의롭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프롤로프를 구해 주려던 앞칸 여자 아들린은, 곤경에 처한 자신을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프롤로프의 행동 앞에서 분노에 찬 눈물을 흘린다. 그녀가 있던 앞칸에서처럼 위기에 처한 여자를 구해줄 일말의 남성적 책임감이라는 게 존재하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롤로프는 앞칸까지 향하며 인간보단 동물에 더 가깝게 행동한다. 꼬리칸을 보지 못하고 자란 아들린은 프롤로프를 이해할 수 없다. 생존을 위한 치열함으로 가득 찼던 꼬리칸에서는, 어쩌면 지금의 인류가 지닌 친절 같은 건 무의미해진 게 아닐까.

 

앞칸에 도착한 프롤로프는 기계실을 지키는 노인을 발견한다. 가벼운 농담과 압도적인 권위를 보이던 영화 속 윌포드는 원작에 없다. 대신 열차 뒷칸과 의사소통이 단절돼 홀로 남아 기계에게 말을 걸기에 이른 노인만이 있을 뿐이다. 노인은 자신의 사후에도 열차가 달릴 수 있게 프롤로프에게 기계를 맡긴다. 다시 꼬리칸으로 돌아갈 이유도, 별다른 선택도 없었던 프롤로프는 이를 받아들인다.

 

아트 슈피겔만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경험한 자신의 아버지를 토대로 그린 그래픽 노블 <>에서, 아버지는 아트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살고 싶으면 친절한 게 좋단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는 분명 대단한 존재지만, 아트는 아버지가 가스실에서 죽어나간 다른 유대인보다는 운이 좋았다고 기록한다. 마치 생존을 점지하는 여러 상황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친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사람들의 친절이나 정의는 이 시대를 살아남기 위한 진화의 산물이다. 고도의 문명과 규율로 지탱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친절과 정의는 생존을 담보하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것이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사회에서, 친절과 정의는 그 힘을 잃는다. 영화 <설국열차>의 커티스는 열차의 꼬리칸에서 생존하기에 지나치게 친절하고 정의롭다.

 

 

 





설국열차
Le Transperneige
(1984-2000)

장마르크 로셰트 
Jean-Marc Rochette
쟈끄 로브 Jacques Lob
벵자맹 르그랑 Benjamin LeGr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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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문화연구(2009)
808.90944 로54ㅅ 


 

 

/ 유지영 기자 alreadyblues@gmail.com

편집/ 이승한 에디터 tintin@iamtint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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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만든 서가]약할 권리 - 야스다 고이치 <거리로 나온 넷우익>

[우연이 만든 서가]약할 권리 - 야스다  고이치 <거리로 나온 넷우익>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일베’

재일한인 생계지원이 과도하다는 ‘재특회’

 

87 6·29 선언 이후, 한국에서 민주주의라는 가치는 누구도 의문으로 삼을 수 없는 가치가 되었다. 87년 이후 태어나 민주화의 수혜만을 입고 자란 세대라면 더더욱 그랬다. 매년 순국한 지사들을 기리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했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느냐는 식의 말을 공공연히 하는 것은 금기였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는 이 금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일베 사용자들은 민주화운동을 조롱하고, 호남 출신 사람들을 홍어라 비하한다. 5월이 다가오자 이들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고, 이것이 언론에 노출되며 비로소 유의미한 비판의 대상으로 부각됐다.

 

물론 그전까지 일베를 조명해보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민주주의뿐 아니라 여성, 노인, 어린이 등의 사회적 약자들을 얕잡아 부르는 집단 내 은어를 만들어 공격했다. 왜 그랬냐는 물음에 그들은 재미로 그랬다는 다소 일관된 답변으로 대답한다. 단어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져서 이미 그 단어가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인지하기 어려워진 뒤였다.

 

그들은 사회가 정한 도덕률을 깨고 금기에 맞서는 행위를 일종의유희로 소비하며 그 감정을 공유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라는 금기를 넘는 불안은 무리 내 은어와 농담의 반복 재생산을 통해 극복됐다. 금기를 넘는 것의 의미는 휘발되고, 집단적 유희로서의 공격만이 남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베는 자신을 스스로 벌레나 병신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비웃고 떠드는 공간일 뿐이라는 인식이 더 강했다. 5월 광주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역린을 건드린 후에야, 일베는 공공연한 사회의 적이 되었고 고소와 고발이 난무하는 조리돌림의 장이 되고 말았다.

 

 

소동이 끝나자 야스쿠니의 가로수에서 흘러나오는 매미 소리만이 주위에 가득했다.

 

 “, 덥다.”

 

 “수고하셨어요.”

 

그토록 폭주하던 참가자들은 그렇게 서로를 치하하며 삼삼오오 흩어졌다. 각각의 표정에서는 극좌 세력을 놓친 아쉬움이나 자신들의 행동을 통제한 국가권력에 대한 분노는 추호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상기된 얼굴에는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떠올라 있었다.

 

 

일본 저널리스트 야스다 고이치가 올해 5월에 펴낸 책 <거리로 나온 넷우익>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을 쫓은 몇 년간을 기록한 탐사 르포이다. 극우주의 단체 재특회는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 코리안(자이니치 혹은 재일동포)들이 과도한 특권을 받고 있다며 이를 규탄하고 그들을 그특권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저자인 야스다 고이치는 그들의 주장이 전부 허구에 가깝다고 말한다. 재특회는 재일 코리안들이 과도한 생활 보호 지원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재일 코리안 대부분은 어렵게 생활하고 있어 생활 보호 지원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 부닥쳐있다. 설사 그들의 주장에 맞는 부분이 있더라도 대개 과장된 것에 불과하다.

 

명확한 적이 보이지 않는 사회
사회적 덕목에 숨 막히는 개인

 

물론 그 사실이 재특회에게 그리 중요하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원했던 건 억누를 길 없는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적당한 대상이었다. 어느 소수자든 그들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그것이 재일 코리안이라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을 그저 덜떨어진 사람들의 유희인양 여기고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던 것은, 사람들이 일베나 재특회를그저 정신적 결함이 있는 소수 집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따로 부락을 만들어 거주하는 사회 외적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사회가 요구하는 의무와 덕목에 지나치게 억눌려있을 가능성이 크다.

 

경제적 능력, 모두가 존경하는 사람이 되는 것, 화목한 가정을 일구는 것 등의 사회가 요구하는 덕목을 충족하지 못했을 가능성. ‘내가 진짜 원하는 게 이거다’. 별수 없는 욕망이지만 그렇다고 이를 말해서는 안 됐다. 사회가 요구하는 덕목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은무능과 동의어이고,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신을 고백한다는 것은 사회적 자살행위와 다름없다.

 

싸울 대상이 명확한 싸움은 쉽다. 과거의 적은 눈에 보이고 명쾌했으며 다 같이 힘을 내서 물리친다는 가상의 카타르시스를 충족시켜 주었다. ‘힘 모아 일하면 보릿고개를 넘을 수 있을 거야. 독재자를 몰아내면 사회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을 거야. 금 모으기 운동으로 국고를 채워 나라가 진 빚을 갚으면 무리한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국외 자본을 이길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다각화된 사회는 과거와 달리 그들에게 확실하고 명확한 적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더구나 개인의 경제적 무능과 자기실현의 좌절은 거대한 적을 찾아 싸움으로 초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제 그들은 홀로 적을 찾아내어 자신의 존립 근거를 확보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제대로 된 욕망의 근거와 마주할 용기가 없거나 근거를 발견하지 못한 이들은 이내 자신이 마주한 실제 욕망을 왜곡시키고 헌신할 대상을 발견한다. 일본에서는 그것이재특회였던 것이다. 그들은 재일 코리안이라는 적을 만들어냈다.

 

나의 욕망에 괴로워하지 않는 대신

‘약자’를 공격해 괴로운 오늘을 잊다

 

그런 점에서 재특회의 시위는 기존까지의 반동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들에게 재일 코리안 시위는 유희나 배설일 뿐, 자신의 이익과 직접 맞닿아 있는 게 아니기에 욕망의 최종목적지가 될 수 없다. 비단 공격의 대상이 재일 코리안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재특회에 관심을 보인 다수 사람들은 오히려 이 시위가 재특회 회원 개인의 욕망과는 관련 없다는 사실 때문에 주목한다. 충족될 수 없는 자신의 욕망 앞에서 괴로워할 필요 없이, 속 편하게 타인을 공격하는 것으로 나의 오늘을 잊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그 때문에 재특회는 명확한 방향을 잃어버린다.

 

일베가 진짜 원하는 건 기존 세대의 금기를 깨부숴버리는 일이다. 그 금기가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폭력과 증오가 원을 그리며 끝없이 돌고 있다. 당면한 욕망을 직시하고, 그것을 자기 힘으로 도저히 이뤄낼 수 없다고, 자신은 보잘것없다고 말하는 대신 그들은 키보드를 두드린다. 우리는 속 편하게 지는 법, 혹은 약한 자신을 인정하는 법을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아낼 권리. 차라리 욕망에 솔직하라는 말들. 어느 쪽도 결코 쉽지 않다.

 

 


거리로 나온 넷우익

ネットと愛国 :
在特会の「闇」を追いかけて

야스다 고이치 安田浩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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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니타스(2013)
청구기호 미정(정리중)
 


 

/유지영 기자 alreadyblues@gmail.com

정리/이승한 에디터 tintin@iamtint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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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만든 서가]갑(甲)질의 추억 - 나쓰메 소세키 <나의 개인주의>




“어째서 제가 근거도 없이 그걸 좇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선배도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럼 바꿀 수도 있잖아요.”

그는 안경 너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막사회테두리에 진입한 그는어른의 목소리와 말투로 내게 말했다. 넌 너무 철이 없다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고. 그건원래부터 그런 거라고. 그는 말을 멈추고 웃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사회에 나가면 지금처럼 윗사람한테 눈 똑바로 뜨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거야. 알아듣니?”

나는 말로도 사람을 때릴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실로 오랜만에, 이념 싸움 없이도 모두가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일들이 연달아 터졌다. P사 임원 기내식 라면 사건, P제과업체 회장 폭행 사건, N유업 폭언으로 이어지는 3대 갑()질은갑을(甲乙) 사회논의에 종지부를 찍었다.

 

객관적인 악한을 설정해 하나로 뭉쳐 단죄하며 누리는 자기충족적 쾌감 때문인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헌법의 기본 정신에 따라서인지. 키보드 앞, 냉장고 속 우유 앞에서의 정의구현이 각계각층에서 실현되고 있다. ‘저희는 N유업 우유를 팔지 않습니다.’라는 신속한 입장표명이 온 동네 마트들을 뒤덮는 한편, 표준계약서의이라는 표기마저 없어진다고 한다. 이리도 아찔한 속도로 정의가 구현되는 나라에서 그동안 갑을 관계는 대체 어떻게 유지되어 온 걸까.

 

누가 봐도 분명한 악을 설정하고 돌을 던지는 건 쉽다. 그것이 자신의 정의나 선을 드러낼 수 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들어 척결 대상으로 거듭난 갑질은 매혹적인 절대악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살면서 한번쯤은 갑의 갑질 앞에 서러웠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니, 절대불변의 악인 갑에 대한 을의 투쟁은 만인의 동의를 구하기 수월하다.

 

그러나 갑과 을은 생각처럼 그리 명쾌하게 나뉘지 않는다. 갑과 을을 설정하고 나면 그 속에서 갑과 을은 다시 무한소수로 쪼개져 상대를 달리해 갑질할 대상을 찾아낸다. 직장에서 한바탕 당한 을이 가정에 들어서자마자 군림하는 갑이 되는 상황은 얼마나 흔한가. N유업 폭언 사건만 봐도 갑은 힘들이지 않고 을 혹은 병()에게 자신의 업무를 가중시킨다. 이 무간지옥은 을이 병을, 병이 다시 정()을 착취하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갑과 을은 늘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다.

 

따라서기내에선 진상을 피우지 말자’, ‘그 제과업체가 망했다더라’, ‘정의를 위해 마시던 우유를 버리자는 말들은 오로지 해프닝으로 소모될 뿐, 어떤 방식으로도 충족될 수 없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갑질을 향한 소모적인 싸움을 계속해야 할까.

 

“원래 의무를 수반하지 않은 권력이라는 형태가 세상에 있을 리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높은 단상 위에서 여러분을 내려다보며 1시간이나 2시간 동안 내가 말하는 것을 정숙하게 듣기를 요구할 권리를 보유한 이상 내 쪽에서도 여러분을 정숙하게 할 만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4,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 학습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나의 개인주의>라는 주제의 강연을 진행했다. 그는 높은 위치에 오른 사람들이 자칫 남용할 수 있는 권력을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단상에 올라 자기 멋대로 떠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을 때 이를 남용하지 말고,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나의 개인주의>에서 발췌한 문장은 권력을 지닌 자인이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1914년의 강연에서는 단상 위에 서 있는 소세키가 갑이고 그의 강연을 듣는 학생들이 을이다. 권력자 갑에게 부여된 모든 권력은 언제나 피권력자 을에 대한 의무를 수반한다. 무한한 의무를 진 갑이 동등한 견지에서 을의 의향을 살피는 형태의 소통은 인간을 유토피아적 평등으로 이끈다.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펼쳐지는 갑질의 무간지옥은 갑에게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이 무간지옥은더러우면 출세하면 된다는 성공 신화를 동력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이 짓을 모두 때려치우고 갑을 따끔하게 단죄하고픈 을의 무한한 욕망, 언젠간 자신도 갑의 위치로 올라서고 싶은 욕망으로 이룩된 신화 말이다.

 

을은 의무 없는 권력을 가진 갑을 탐하고, 의무를 방기한 권력은 그를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 있도록 이끈다. 을은 눈을 감고 병이나 정에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한다. 이 질서는 너무도 편안해서 짐짓원래부터 그런 것이었다는 말들과나도 저렇게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을들의 은밀한 욕망 속에 은폐된다. 소세키는 말한다. “의무를 수반하지 않은 권력이라는 형태가 세상에 있을 리 없다고.

 

지금은 당연한 듯 분개하고 이야기되는 평등의 역사는 매우 짧다. 불평등은 인간 역사를 이룬 가장 오래 지속되던 상식 중 하나였다. 한때원래부터 그런세상의 원리였던 불평등은철없는이들이 꿈꾼 유토피아적 평등에 대한 갈망과,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이들의 오랜 세월의 투쟁 끝에 청산해야 할사회악으로 강등됐다. 세상에 원래부터 그런 건 사실 아무것도 없다.

 


 





 

나의 개인주의 私の個人主義

나쓰메 소세키 夏目漱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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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2004) 813.45 하351ㄴ 




 

 

/유지영 기자 alreadyblue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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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만든 서가]요조는 굶주려본 적이 없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부끄럼 많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우주가 여기저기서 죽어가는 데 뭇사람들은 그 우주를 곧잘 소비해내더군요. 뉴스로 지하철 안에서 커피숍에서 정말이지 잘도 떠들어댔습니다. 등록금을 내지 못해 건물에서 떨어진 대학생 혹은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벌다가 고용주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자살한 학생까지.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들을 소비하고 죽였습니다. 제가 그들의 몫을 빼앗았고 그들의 죽음을 수수방관했습니다.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많은 것을 요구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외려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저를 보며 손가락질하고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습니다
. 생계와 관련된 일들에는 도무지 관심이라는 게 없었으니까요. 그 은수저를 등 뒤로 감추고 살고 싶었습니다. 대학에 와서 문학을 전공했습니다. 하지만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잔인한 현실조차 문학이라는 틀을 한 번 거치고 나면 으레 아름답게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보고 읽고 쓰고 동정했습니다만 그것도 그뿐, 문학 속의 현실이 제 삶은 아니었으므로. 저는 은수저를 움켜쥘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저를 떨어트릴 순간부터 시작될 불행 ―온정을 베풀 수 있는 인간적인 삶을 져버릴 것이다. 이 나락의 연쇄―을 잠을 설치도록 두려워한 탓이겠지요. 물고 있던 은수저가 떨어지면 나도, 그리고 내 삶도 같이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집회에 나갔습니다
. 높은 대학 등록금 액수에 항의하는 그런 집회였습니다만 그곳에서조차 저는 관찰자 신세였습니다. 새벽 2시 서울 종로 한복판에는 취객들, 경찰들, 그리고 기자들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많이들 모여 있더군요.

멍하니 경찰의 23차 경고를 관망하고 있던 저에게 기자들 무리 중 누군가가 어느 신문 아무개라며 다가왔습니다. 대학생이시죠? 등록금은 얼마나 내고 계신가요? 대학생으로서 이런 방식의 시위를 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반값 등록금이라는 게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기자의 질문에 많은 시간을 들여 답을 해주었습니다. 기자는 수첩 빼곡히 제 대답을 적더군요. 하지만 그날의 불행은 기자의 마지막 질문에 있었습니다. 등록금은 어떤 방법으로 버시나요? 순간의 정적이 흘렀습니다. 거리 저 끝에서는 많은 수의 경찰들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전액 대주시기 때문에 저는 사실 반값 등록금이 필요 없습니다. 반값 등록금 시위의 정당성을 떠들어 댄 이후였습니다. 거기서 저는 그렇게 공포하고 말았습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기자의 얼굴에는 약간의 조소가 흘렀습니다. , 그렇군요. 그녀는 마지막 답변을 적지 않고 수첩을 덮더니, 마침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습니다.

, 그렇군요. 저에게는 드러누운 학생 무리에 낄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닥에 엎드려 소리치고 울던 학생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당신들이 상대해야 할 대상은 경찰이 아닌 바로 저 같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끝끝내 아주 망가지지는 못할 겁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주 망가져 버릴 수 없다는 두려움에 근거하니까요.

 

 

저는 끝끝내 아주 망가지지는 못할 겁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주 망가져 버릴 수 없다는 두려움에 근거하니까요. 인간실격의 요조는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수기가 끝날 때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배고파 본 적이 없습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에 근거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요조는 이 일을 미신으로 치부하고 싶어 합니다. 가족들은 마치 괴물 같다며 가족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건만 그들이 보내준 돈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는 모순에 대해, 요조는 어쩌면 의연하고 싶었던 겁니다. 요조는 가난에 대한 희미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고 진술하나 그럼에도 경멸심이 없다고 결백하게 말했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가난은 요조에게 자신을 경멸할 기회를 준 적이 없었으니까요.

아버님이 이제 안 계신다. 내 마음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던 그 그립고도 무서운 존재가 이젠 안 계시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공연히 무거웠던 것은 아버지 탓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수기 내내 아버지는 절대적 존재이자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며 죽고 나서도 아버지로 상징되는 자본이 요조의 머리 위를 배회합니다. ‘돈 떨어지는 날이 인연 끊어지는 날이란 말이야.

요조의 창조주이자 그와 가장 가까운 분신인 다자이 오사무가 행했던 5번의 걸친 자살 시도의 원인 역시 그의 친가와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다자이가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접하며 느낀 어찌할 수 없는 죄책감이 하나의 근원일 테지만 병약한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살하는 수밖에요.


 

 



 


인간실격
人間失格

다자이 오사무 太宰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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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문화사(1995) 813.35 태72

문예(2003) 813.36 태7281

을유문화사(2004) 813.35 태72

을유문화사(2009) 813.36 태72ㅅ2

민음사(2010) 808.8 세1438

시공사(2010) 813.35 태72

 

 

 

글/유지영 기자 alreadyblues@gmail.com

편집/이승한 에디터 tintin@iamtint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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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만든 서가]멘토 권하는 사회-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당신을 이렇게 위로하려고 애쓰는 이 사람이 당신에게 가끔 위안이 되는 소박하고 조용한 말이나 하면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의 인생 역시 많은 어려움과 슬픔을 지니고 있으며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뒤처져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 사람이 그러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여기 당신을 위한 최고의 자기계발서가 있다.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인이고, 몇 세대에 걸쳐 회자되고 있을 뿐 아니라, 당신에게 진심 어린 위로와 적당한 조언을 해줄 줄도 안다. 물론 햇병아리 멘티들에게 친필로 정성스런 편지를 쓰는 것 정도는 기본이다. 어느 스타강사 왈, 저자의 지혜가 300페이지 안에 농축된 책이 자기계발서라고 하니 이 책은 더할 나위 없다. 100페이지면 완독이 가능한 이 책은 당신의 소중한 시간까지 절약해 준다. 이보다 더 근사한 자기 계발서가 또 어디 있으랴. 멘토가 이쯤 했는데도 그 지혜를 받아먹을 수 없다면, 애석하게도 그건 모두 게으른 멘티인 당신 탓이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시인 지망생이었던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가모순 혹은 장미꽃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 받은 편지 10편을 묶어 출간되었다. 물론 사적인 편지가 이렇게 수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팔리는 건 릴케의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카푸스는 책의 서문을 통해 문학청년들이 릴케의 조언을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 아니겠는가? 릴케 역시 어려운 인생을 살아왔고, 시인으로 성공했다. 그에게는 조언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히 주어진다. 이제 그의 인생을 흡수해 100페이지의 지혜로 녹여내는 일만 남았다.

작년 한해 한국인의 정신건강 및 보건복지에 힘쓴 청춘 멘토들의 조언과 힐링은 정확히 이런 과정을 거친다. 한국인이 열망하는 객관적 성공 - 대개 매우 힘든 과정이었노라고 회자되는 - 을 거친 멘토들은, 취업을 목전에 둔 20대를 향해 자기 이야기를 들려줬다.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꿈을 가졌고, 이를 얼마나 열망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끝내 어떻게 획득할 수 있었는지. 20, 혹은 청춘으로 호명되는 잠정적인 청년 멘티들이 과연 멘토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어하는가는 그리 고려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열망하는 삶이야말로 바람직한 삶이기 때문이란다.

그들의 멘토링이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멘토들은 온갖 어려움을 딛고 성공했으며, 다른 이들을 도와주고자 기꺼이 손을 내미는 진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진심만으로 청춘의 현실을 막아낼 수 없었다. 진심도 일단은 잘 팔려야 더 많은 이들에게 더 많은 진심을 이야기할 기회를 살 수 있었다. 다수의 멘티를 거느린 대부분의 멘토들은 멘티 한 명 한 명에게 감정이입하기에는 진심을 파느라 너무 바빴고, 그들이 만났던 청춘 또한 불행히도 모든 청춘을 대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릴케의 편지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자기계발과는 조금 다르게 읽힌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릴케가 카푸스에게 보낸 편지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카푸스가 릴케에게 자신의 습작 시들을 보내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릴케는 카푸스의 편지들을 읽으며 불특정 다수의 멘티가 아닌 카푸스라는 개인을 보았고, 그의 시에 손수 답변을 달아주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충고하고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위로의 방식은

대개 자기 발에 꼭 맞는 대상과의

교류를 통해 이루어진다.

 

릴케는 카푸스의 삶에 자신의 발을 담그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청년기의 자기 자신을 다루듯 카푸스의 편지에 답했던 것이다. 릴케의 독려, 혹은 카푸스를 향한 질문도 사실은 과거 릴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릴케가 열 편의 편지에서 언급한 고독은 카푸스보다 자신의 생이 더 뒤처져있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조언자의 배려다. 위로의 방식은 대개 자기 발에 꼭 맞는 대상과의 교류를 통해 이루어진다. 릴케는 자신이 먼저 걸어간 길을 카푸스가 좀 더 나은 모습으로 걸어주길 바랐다.

물론 그의 편지가 카푸스를 구할 수는 없었다. 카푸스는 릴케와의 서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자신이 원하지 않던 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그는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글을 써야만 하는지 물어야 한다는 릴케의 조언에 성실히 답했다. 그는 통속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고 평생 글을 쓰는 생을 택한다.

이 책을 집어들 당신에게 릴케는 성실히 답해줄 것이다. 어쩌면 가장 훌륭한 자기계발서일지도 모른다. 단 당신이 시인이라는 직업을 열망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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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렌즈
 (2005)

836.912 823
 

고려대학교출판부 (2006)

836.912 823

 

기파랑 (2012)

836.912 823

  

/유지영 기자 alreadyblues@gmail.com

편집/이승한 에디터 tintin@iamtint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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