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만든 서가]갑(甲)질의 추억 - 나쓰메 소세키 <나의 개인주의>




“어째서 제가 근거도 없이 그걸 좇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선배도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럼 바꿀 수도 있잖아요.”

그는 안경 너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막사회테두리에 진입한 그는어른의 목소리와 말투로 내게 말했다. 넌 너무 철이 없다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고. 그건원래부터 그런 거라고. 그는 말을 멈추고 웃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사회에 나가면 지금처럼 윗사람한테 눈 똑바로 뜨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거야. 알아듣니?”

나는 말로도 사람을 때릴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실로 오랜만에, 이념 싸움 없이도 모두가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일들이 연달아 터졌다. P사 임원 기내식 라면 사건, P제과업체 회장 폭행 사건, N유업 폭언으로 이어지는 3대 갑()질은갑을(甲乙) 사회논의에 종지부를 찍었다.

 

객관적인 악한을 설정해 하나로 뭉쳐 단죄하며 누리는 자기충족적 쾌감 때문인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헌법의 기본 정신에 따라서인지. 키보드 앞, 냉장고 속 우유 앞에서의 정의구현이 각계각층에서 실현되고 있다. ‘저희는 N유업 우유를 팔지 않습니다.’라는 신속한 입장표명이 온 동네 마트들을 뒤덮는 한편, 표준계약서의이라는 표기마저 없어진다고 한다. 이리도 아찔한 속도로 정의가 구현되는 나라에서 그동안 갑을 관계는 대체 어떻게 유지되어 온 걸까.

 

누가 봐도 분명한 악을 설정하고 돌을 던지는 건 쉽다. 그것이 자신의 정의나 선을 드러낼 수 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들어 척결 대상으로 거듭난 갑질은 매혹적인 절대악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살면서 한번쯤은 갑의 갑질 앞에 서러웠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니, 절대불변의 악인 갑에 대한 을의 투쟁은 만인의 동의를 구하기 수월하다.

 

그러나 갑과 을은 생각처럼 그리 명쾌하게 나뉘지 않는다. 갑과 을을 설정하고 나면 그 속에서 갑과 을은 다시 무한소수로 쪼개져 상대를 달리해 갑질할 대상을 찾아낸다. 직장에서 한바탕 당한 을이 가정에 들어서자마자 군림하는 갑이 되는 상황은 얼마나 흔한가. N유업 폭언 사건만 봐도 갑은 힘들이지 않고 을 혹은 병()에게 자신의 업무를 가중시킨다. 이 무간지옥은 을이 병을, 병이 다시 정()을 착취하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갑과 을은 늘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다.

 

따라서기내에선 진상을 피우지 말자’, ‘그 제과업체가 망했다더라’, ‘정의를 위해 마시던 우유를 버리자는 말들은 오로지 해프닝으로 소모될 뿐, 어떤 방식으로도 충족될 수 없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갑질을 향한 소모적인 싸움을 계속해야 할까.

 

“원래 의무를 수반하지 않은 권력이라는 형태가 세상에 있을 리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높은 단상 위에서 여러분을 내려다보며 1시간이나 2시간 동안 내가 말하는 것을 정숙하게 듣기를 요구할 권리를 보유한 이상 내 쪽에서도 여러분을 정숙하게 할 만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4,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 학습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나의 개인주의>라는 주제의 강연을 진행했다. 그는 높은 위치에 오른 사람들이 자칫 남용할 수 있는 권력을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단상에 올라 자기 멋대로 떠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을 때 이를 남용하지 말고,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나의 개인주의>에서 발췌한 문장은 권력을 지닌 자인이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1914년의 강연에서는 단상 위에 서 있는 소세키가 갑이고 그의 강연을 듣는 학생들이 을이다. 권력자 갑에게 부여된 모든 권력은 언제나 피권력자 을에 대한 의무를 수반한다. 무한한 의무를 진 갑이 동등한 견지에서 을의 의향을 살피는 형태의 소통은 인간을 유토피아적 평등으로 이끈다.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펼쳐지는 갑질의 무간지옥은 갑에게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이 무간지옥은더러우면 출세하면 된다는 성공 신화를 동력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이 짓을 모두 때려치우고 갑을 따끔하게 단죄하고픈 을의 무한한 욕망, 언젠간 자신도 갑의 위치로 올라서고 싶은 욕망으로 이룩된 신화 말이다.

 

을은 의무 없는 권력을 가진 갑을 탐하고, 의무를 방기한 권력은 그를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 있도록 이끈다. 을은 눈을 감고 병이나 정에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한다. 이 질서는 너무도 편안해서 짐짓원래부터 그런 것이었다는 말들과나도 저렇게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을들의 은밀한 욕망 속에 은폐된다. 소세키는 말한다. “의무를 수반하지 않은 권력이라는 형태가 세상에 있을 리 없다고.

 

지금은 당연한 듯 분개하고 이야기되는 평등의 역사는 매우 짧다. 불평등은 인간 역사를 이룬 가장 오래 지속되던 상식 중 하나였다. 한때원래부터 그런세상의 원리였던 불평등은철없는이들이 꿈꾼 유토피아적 평등에 대한 갈망과,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이들의 오랜 세월의 투쟁 끝에 청산해야 할사회악으로 강등됐다. 세상에 원래부터 그런 건 사실 아무것도 없다.

 


 





 

나의 개인주의 私の個人主義

나쓰메 소세키 夏目漱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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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2004) 813.45 하351ㄴ 




 

 

/유지영 기자 alreadyblues@gmail.com

편집/이승한 에디터 tintin@iamtint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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